[안동시 공동 기획연재] 2018 안동·예천 근대기행(6)

괴정리의 자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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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갓뒤 버스정류장
 
 
갓뒤·갓디·지북(枝北)
 
괴정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34번 국도를 이용하여 예천 방면으로 진행하다가 풍산농공단지 조금 못 미쳐 풍산읍 오미리와 연결되는 지방도로 접어들면 만나는 마을이다. 숲의 뒤쪽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고 하여 갓뒤라 한다. 이 마을에는 매년 정월 보름에 동제사를 올리던 동수나무가 마을 뒤 산비탈에 보호수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이 느티나무로 인하여 괴정리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 가구 수는 50호 가량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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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래미
 

바래미[발산(鉢山)]

 
 
갓뒤의 앞쪽 지대가 조금 낮은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1600년경에 사람들이 들어와 마을을 이룰 때에 집을 짓고 보니 바람이 심하게 불어 바래미라고 불렀다. 풍북교회가 자리 잡은 마을 뒷산 모양이 바릿대(鉢) 같다고 해서 바래미라 했다고도 한다. 경북바이오산업단지가 들어오면서 인가와 토지가 모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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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뒤 표지석. 도로를 경계로 농공단지와 마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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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뒤
 
 
절뒤
 
풍산농공단지와 인접한 마을로 절 뒤에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괴정리의 터줏대감들
 
# 열여섯에 시집 온 처마 끝에 박꽃, 박분금
 
도로변에서 바래미로, 바래미에서 다시 갓뒤로
 
솥절에 묻힌 영감님과 가족들
 
박분금 : 1929년생, 본관 영해, 풍산 소산 1리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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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분금씨
 
 
산업단지 속에 매장된 마을 바래미
 
요 굴로 들어가매 돼요. 쪼매 가마 요 오른짝으로 질(길) 있자네. 이 질로 가면 돼. 저기 높은 집 지 놨는데 저가 바래미 동네래. 집도 땅도 하나도 없어. 다 드갔어. 집이 스무 가구 쯤 됐나. 우리 하고 같이 집 지은 이가, 네 집이 같이 지었어. 저가 바래미 터래. 여도 바래민데 논밭이랬지. 여가 동네랬어. 우리 땅이 여기 있었는데. 여 질 드까뿌고. 한 개도 없이 다 드갔어. (사진을) 요새 찍어 뭐 하노. 드가기 전에 찍어야지.
 
우리는 아들이 바래미 동네도 다 찍어놨어. 근데 그 사진이 내한테 있는 동 없는 동 몰래. 골목에 나오는 거도 찍고. 바래미 동네서 이리 질이랬어. 안즉 질은 거 있어. 4차선 도로 옆에. 바래미 동네에서 원동네 뒷절 회관으로 회의하러 오는 질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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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래미의 현재 모습. 경북바이오산업단지에 모두 편입 되었다.
 
 
바래미에서 솥절로 이장한 가족 묘
 
바래미 동네 들어가는 바람에 산소가 마카 일로 와가지고 아들들 오는 대로, 손자들 오는 대로 내가 이 골(솥절)에 일 년에 열두 번도 더 와. 아들이 바람 쐬 준다고 차타고, 나는 다리가 아파 산소 잘 안 올라가지만. 이골에 우리 영감도 있고 시동생도 있고 그 짝 너매 가면 시어마이 시아바이도 있고 여 다 있어. 솥절에는 농막이 있지. 올해 새로 지은 집도 한 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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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솥절
 
 
왜정 때 내가 시집을 왔어. 옛날 동수나무는 시집 올 때도 있었지. 우리 집 영감이 조기제, 나는 박가고. 박분금, 90이지 뭐. 시집은 열여섯 들던 1월 14일 날 왔어. 괴정 도롯가(도로변)에 살았어. 도롯가는 그때 차가 요래 한 대 댕깄는데 도로 확장하는 바람에 바래미에 집 짓고 가서 살았지. 40년, 50년 사다보이 또 산업단지 되는 바람에 일로 집을 지어 왔지. 영감은 집 짓고 7년 만에 돌아가셨어. 맥지 게이트볼 치다가 쓰러졌어.
 
괴정은 동네는 넓어도 문화재나 명소나 그런 거는 별로 없어. 일본 시절에는 지서가 있었다 카더라. 우린 보지는 못했지. 쪼매하게 있다가 풍산으로 넘어갔지 뭐. 괴정은 여러 곳인데 솥절하고 바래미는 없어졌고 농공단지가 미리 되고 또 산업단지 되는 바람에 다 없어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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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류동 박씨고가 
 
   (1973년 8월 31일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5호로 지정되었다. 안동시 월곡면 가류동에 있던 것을 1975년 안동댐 건설 수몰 지구에 포함되어 현재 위치로 이건하였다. 원래 초가지붕이었는데 약 150년 전에 기와지붕으로 바꾸었다. 까치구멍집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영감이 풍북국민학교 6학년 때 장가들었어
 
나기는 풍산 소산1동 나바우에서 났지. 우리는 영해 박가지. 밀양박씨 이 동네 마이 살지만. 옛날에는 우리 어매가 아를 마이 나가지고, 한 댓살 먹이 놓고 낳고, 낳고 해가지고 나를 나 놓으이 울 오빠가 내 하고 나이 차이도 많지. 그래가 울 오빠가 가가 일본 나이로 해가지고 이름도 지 왔는데, 내가 옳게 하만 90이래. 옳게 하마 뱀띤데 말띠지. 어릴 때 종종머리 따가 뭐 하는데 어떤 대사가 집에 왔어. 몇 살이냐고 물으이 아버지가 ‘야는 일본 나이로는 아홉 살이고 우리 나이로는 열 살’이라 하이 대사가 사주를 맞춰보이 말띠로 하면 띠가 좋고 시가 좋아서 자식이 많고 이식이 많다고 그래 하라니까 아버지가 정해준 대로 호적을 써. 호적으로는 1930년생이고 원래는 1929년생이래. 영감은 한 살 위 함안 조씨래. 중매했지. 선도 못 봤어. 낯짝도 못 봤어. 영감이 풍북국민학교 6학년 때 나한테 장가들었어. 그때는 6학년이라도 나이가 많았잖아. 학교에서 걸음을 하도 잘 뛰어서 선수랬어. 우리 시누이도 잘 뛰고 미국 가있는 딸도 걸음도 잘 뛰고 쟁반 같은 것도 잘 던지고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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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전의 조기제씨
 
 
우리 영감이 옛날에 비름간 대장일을 했어
 
우리 영감이 옛날에 비름간 대장일을 했어. 두드려서 칼도 만들고 낫도 만들고 하는. 시집오이 시아버님이 대장일을 하고 계셨어. 농사가 많지는 않앴어. 농사도 하면서 대장일도 했지. 대장간이 풍산도 있고, 구담도 있고, 중리도 있고, 예천도 돌티 드가는데 거도 해놨고. 옛날엔 그걸로 먹고 살았지. 대장간은 이름도 없었어. 하다가 아들이 못하게 해가지고 영감 환갑 전에 치았어. 좀 먹고 살만 하께네. 30년도 더 된 일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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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없는 대장간을 운영했었다
 
 
 
괴정교회 장로를 지낸 시아버지
 
(새풍북교회)교회가 백년 넘었지. 우리 시아버님이 조장로인데 그 어른이 살아계시마 하매 백 살이 훨씬 넘었지. 우리 시조모가 댕겼다 그는데 보지는 못했지. 아버님은 74세에 일찍 돌아가셨어. 아! 인자하시고 참 좋으셨어. 더 사셨더라면 좋은데 그게 그래 원통해. 새풍북교회는 괴정교회랬는데 우리 아버님 계실 때 세 집만 남고 교회가 갈리다보이. 저 큰 풍북교회도 그렇고 지금은 교인이 예전만 못해. 우리 교회도 스무 댓 명인데 오늘은 남자들이 열 명이고. 젊은이들 객지에 나가고 나이 많은 이들 다 죽고 하니 촌에 사람이 없어요. 영감 환갑 때 조목사 예배 보는 모습이래. 시아버님은 용자 돌림인데 우리 셋째 아들이 내더러 돌림자 잊지 말라고 이래 써 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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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안조씨 항렬을 쓴 메모와 시부(셋째 아들이 함안조씨 항렬을 잊지 말라며 어머니에게 적어준 메모와 괴정교회 장로를 지낸 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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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 남편 조기제씨의 환갑을 맞아 새풍북교회 신도들과 환갑 예배를 보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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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 바래미 옛집 마당에서 남편 조기제씨의 환갑잔치를 열었다
 
 
바래미 옛집에서 옮겨온 장미
 
우리 집이 밀창이랬는데 나중에 추워가지고 밀창을 없애고 벽을 쌓고 거실 문을 달았어. 바래미 집에 있던 장미는 이 집에 캐 왔어. 장미 옆에 샘이 있었어. 바래미 집에서 바깥어른 환갑 잔칫날 찍은 사진이래. 여는 바래미 우리 밭이래. 영감이 농사짓는 모습. 모 심구는 거도 어디 있어. 지금은 산업단지로 다 들어가고 터도 망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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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2년 2월 바래미 옛집에서 찍은 가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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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당에는 물펌프가 있었던 바래미 옛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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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래미 옛집 우물가의 장미. 새집 울타리에 옮겨와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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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래미 옛집에서 남편 조기제씨와 다정한 한때. 게이트볼에 열중했던만큼 남편은 게이트볼 단체복을 입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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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래미 옛 농지
 
 
내가 별호가 박꽃이인데 어째 알고 박꽃을 썼는지
 
둘째 아들이 총각 때도 캐나다도 갔다 오고, 결혼 하고 미국도 가고. 이거는 둘째 아들이 쓴 『쌀 한 됫박』이래. 옛날 못살던 시절 이야기지. 이건 『박꽃 같은 여자가 좋다』, 내가 본디 별호가 박꽃이인데 근데 야가 어째 알고 박꽃을 썼는지. 처마 끝에 박꽃은 박분금이, 내가 박분금이거든. 젊어서 새댁네들이 그래 별호를 지어줬어. 이건 책 낸 둘째 아들이 서울 살 적에 오라 그래 가주고. 사진이 다 흑백이자네. 옷이 포르므리한데. 내가 이래 살아도 자식들이 많아서 호강을 마이 했어. 아들 결혼하기 전이래. 서울 남산공원에서 찍었어. 둘째가 신문에 글도 나오고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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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분금씨와 둘째 아들 조정래씨(1971년 남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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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아들 조정래씨가 낸 책과 신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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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래씨가 괴정리 정살미약수터의 유래에 관해 쓴 글(정살미약수터는 괴정리 산 87번지에 소재하며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외지에서도 많이 찾는 알려진 곳이다.)
 
 
동네는 커도 특수작물은 안 해
 
유럽 가가지고 사진을 백 몇 장을 찍었어. 둘째는 남의 나라 마이 가 있었어. 나도 이래도 영감하고 프랑스, 스위스, 독일, 영국, 벨기에, 미국 다 갔다 왔어. 알프스 산에도 차타고 케이블카 타고 올라갔어. 둘째가 그렇게 데리고 다녔어. 미국은 딸이 거 있으이 농사지어서 매상 대놓고 가서 넉 달씩 있다오고 그랬어. 3월에는 와야 농사를 짓지. 농사는 고추하고 벼하고 콩하고 그래 했지. 여는 동네는 커도 특수작물은 안 해. 마카 콩 농사짓고, 우리는 농사 안지은지 15년 가까이 돼. 나도 닭발 공장에 16개월 갔었어. 한 20년 됐어. 댕기다가 팔 뿔개가지고 수술 했는데. 그러고는 안 갔어. 전에는 암꾸도 못했지. 농사짓고 식구 많고. 아이고! 돈 되고말고. 닭발공장이 이 동네에서 최고 좋았지. 도움이 많이 됐지. 닭발공장 오기 전에는 땅콩을 깠지. 땅콩 장사가 있어서 손으로 다 깠어. 우리 동네 도롯가(도로변)에 있어서 마이 벌어 머찌. 산업단지나 농공단지는 우리한테는 아무 상관이 없지. 나가 많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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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괴정동에서 이발 일 하다가 일본으로 간 시삼촌
 
6.25사변 겪느라 고생하고 피난은 집안사람이 있어서 갯가 설못(풍산읍 소산리)으로 갔어. 왜정시대 아버님이 5형제인데 일본 간 시삼촌 내외 사진이래. 작년에 이 집 딸이 소련(러시아) 살다가 서울인가 대전인가 와서 사는데 우리 집에 찾아왔디래. 시삼촌이 여 살적에 집터도 있어. 괴정동에서 이발 일을 했다고 그래. 내가 시집 오이 가고 없어. 내가 시집 온지가 하매 73년 인데. 사진은 시삼촌 아들네래. 한국에 여러 번 왔지. 어디 놀러가서 찍은 사진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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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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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숙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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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삼촌 자제들과 함께
 
 
남자들은 산(게이트볼 경기장)에, 여자들은 마을회관에 모인다.
 
이건 영감이 게이트볼 치는 거. 남자들은 산(게이트볼 경기장)에 여자들은 마을회관에 모이. 게이트볼장 잘 지어 놨지. 얼매나 잘지 놨다고. 우리 영감이 이 동네에서는 최고 미리 배와 가지고 잘했지. 그래 요새 저래 집을 잘 지어 놓으이 영감 생각이 나. 그때는 그냥 맨땅에서 했지. 지금은 비가 와도 괜찮지. 영감이 잘 쳤어. 대회 가면 상을 타왔어. 내가 아들네 집에 가서 80살 생일을 하는데 아들이 데리러 와도 안 가. 옷까지 다해줬는데도. 그때 게이트볼 대회 가는데 미쳤어. 나이는 최고로 많앴지. 겨울에는 새벽마다 거 가가 장작불 지피고 고구마 농사지어 자루 째 가져가서 구워먹고 영감 옷이 매란 없고 그랬지. 풍산 가가 맨 먼저 배워 와가 최고로 잘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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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이트볼대회 입상 후. 뒷줄 좌측 두 번째가 고 조기제씨, 앞줄 중앙에 상패를 든 김종진 씨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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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동강변 게이트볼 경기장에서
 
 
우리 영감이 키가 작아도 일은 잘했어. 마을회관에도 영감 일하는 사진 6,7장이 걸리 있어. 영감이 동네 일 보는 데는 선두로 다닜어. 고학(한학)을 배웠지. 노인회 총무를 8년이나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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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 환경정비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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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정삼거리에서의 마을 환경정비사업. 예전 구판장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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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 환경정비사업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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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회관에 걸어둔 마을 환경정비사업 사진들
 
 
내 식구가 40명이 넘을 걸
 
손자가 10명인데 군대도 다 갔어. 손녀가 9명, 증손이 7명이래. 손서, 손부가 6명, 내 식구가 40명이 넘을 걸. 큰 아들을 내가 열여덟에 낳았으니 일흔 둘이래. 지금은 영감 가고 혼자 사니 서럽기도 해. 우리도 자식들한테 호강 받으며 살았어. 이 사진들을 내가 인제 다 없앨라고.
 
이 집 지을 때 내가 옛날부터 다리가 아파서 집을 높이 못 짓게 했지. 옆집이 옛날 동장(박한철씨) 집이래. 그분이 동장을 한 20년 넘게 했어. 마을회관에 모인 어른들은 밥값 500원 내고 저녁까지 해결하고 가. 같이 가서 저녁 한술 뜨고 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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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당에 선 박분금씨. 뒤로는 풍북교회가 보이지만 집안 대대로 새풍북교회 신도다.
 
 
# 괴정에서 나고 자란, 괴정리 이장 20여년 박한철
 
마을회관 앞에서 씨름 해서 면소재지를 정했지
 
박한철 : 1935년생, 괴정리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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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년 동갑내기 부부 박한철, 최우자 부부
 
 
예전에 풍북면이 참 컸지
 
소방대 훈련 장소는 이 위고. 예전에 풍북면이 참 컸지. 우리는 나기 전의 일이지. 근 100년이 다 되어가는 일이지. 내가 1935년도에 났거든. 내가 나기 1년 전에 풍산으로 통폐합 됐어. 풍북국민학교에만 이름이 남아있지. 면소 터가 아직 남아있고. 교회는 새풍북교회가 제일 오래 됐어. 여기서 갈라져서 새 교회(풍북교회)가 나갔지. 여는(새풍북교회) 원래 괴정교회랬지. 소산 가서 교회를 다니다가 요새 백 살, 백 한 살 되는 분들이 모두 모이가 미루낭구를 마구 베다가 초가집을 짓고 6.25사변 때 까지 그랬는데 사변 후에 미군들 다리 놓고 남은 낭구를 얻어다 새로 넣고 크게 짓잖아. 그러다가 교회가 반동가리 됐다고. 여 우여곡절 마이 겪었어. 이게 백여 년 가까이 되께레. 우리 삼촌들이 열댓 살, 열일곱 살 때니까 얼마나 오래 됐어. 내가 지금은 풍산읍 노인회 분회장이래. 게이트볼도 우리 힘으로 여 갖다 놨는데. 나도 풍북국민학교 나왔지. 졸업사진이야 있었지만 6.25 때 인민군들이 와서 전부 찢고 불 놓고 해서 없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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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북초등학교는 1928년 풍북공립보통학교로 괴정리 571번지에 개교하였다. 설립 당시 1학급 11명의 학생과 5명의 교직원으로 시작하였다. 1941년 풍북국민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며 1959년 학생수가 2,026명이나 될 정도로 규모가 컸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1969년 신양분교장 안양국민학교로 독립하였다가 1996년 다시 풍북초등학교로 교명이 변경 되었다.
 
 
씨름해서 면소재지 정한 건 송낙구 어른이 면장 시절이지. 씨름했던 장소는 마을회관 앞 여기 밭이래. 갑술년(1934년 7월 영호남지방에 큰 폭우가 내려 여러 제방이 붕괴되고 영호루가 떠내려가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에 운보천방이 터져가지고 그 양반이 거돠 가지고 유명하고 공로가 많애. 명 타는 건 내가 했는데 뭐. 농공단지 설정은 류원모 군수 재직 시절에 설명회를 했어. 농공단지 오고 나빠진 것도 없고 좋아졌다 그는 건 뭐 아직 더 있어봐야 알지. 저것(농공단지)도 들어온 지가 30년이 넘었는데 뭐. 산업단지는 국가공단으로 된 건데 농공단지 되고 달아서 된 거래. 산업단지 들어간 바래미는 22집이 있었어. 77, 78, 79년도에 14개 반 192호가 있었다니까. 솥절은 최고 많을 때 7집 있다가 5집 있다가 없어졌어. 솥절에 최근에 새집이 한 채 지어졌지. 절터는 없지. 고려 시대 때 얘긴데. 도청에서 나오다 보면 가구점 있는 곳이 영뱅이래. 지금 가정집은 네 집 정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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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소재지를 정하기 위해 마을 대표들이 씨름을 했다는 장소(괴정리 마을 회관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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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북면 지서가 있던 자리(풍북초등학교 맞은 편 34번국도 위가 지서가 있던 자리다. 지서 옆에 우물이 깊었다고 한다.)
 
 
국립종자원에 공급하는 종자콩, 종자나락
 
주로 짓는 농사는 콩하고 벼하고. 종자단지에 보급하는 종자콩, 종자나락이지. 팻말 있는 데가 다 종자단지 하는 데래. 그 외에는 별로 없지. 젊은 사람들 도시로 다 나가고 요새 농촌에는 전부 노인들만 한 둘씩 사는데 뭐.
모든 것은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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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종자원 벼 보급종 채종포장(영뱅이, 국립종자원 경북지원은 괴정리와 인접한 매곡리 627-1번지에 있다. 이 때문에 일찍부터 괴정리는 특수작물 대신 나락과 콩을 국립종자원에 보급할 종자로 계약 재배하고 있다.)
 

그렇지. 모든 것은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원칙이래. 내가 동장할 때 이 회관을 1997년도에 지 놓고 IMF가 왔거든. 그때는 복지관으로 지어 달라 했는데 안됐어. 국가 돈으로 다 짓는데 공로는 무슨 공로? 요새 건물 쪼매난 거 지 놓고 앞에 비석이고 뭐고 세우는 거 그게 뭐 하는 거래? 내 공로가 아니래. 내가 그 자리에 있을 때 여건이 됐으니까 한 거지. 내 돈 들인 것도 아니고. 내가 하고 몇 대 건너서 지금 아들이 이장이지만 나는 거기 입도 안 띠. 간섭 안 해. 시대에 따라 다른 거 아니냐. 나는 70년대에서 80년대, 90년대, 이천년 초반 까지 왔지만 아들은 2010년대 아닌가. 모든 것은 변화와 개혁이 돼야지. 그렇지 않으면 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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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정리 마을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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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회관으로 향하는 박한철씨
 

 

 
에필로그
 
괴정리를 취재하며 마을을 여러 번 드나들었다. 박한철 어른과는 사전 약속 없이 우연히 세 번을 마주쳤다. 처음에는 가던 길을 멈추고 예전 풍북면 시절 지서 자리를 가르쳐 주었고 다음에 만났을 때는 부인과 함께 차에 동승하여 영뱅이와 개상골까지 안내했다. 그리고 마을회관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무슨 취재를 그렇게 여러 번 하냐고 농담 섞인 면박을 주기도 했다. 한번 취재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니 여러 번 확인하고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기록하는 게 맞는 거 같아 그렇게 한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과연 그러한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았다. 사람의 기억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으며 사람들이 남긴 기록의 진위 여부를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사람과 시대가 만들고 써 온 기록들에 의문을 가지고 의심하여야 하며, 또 누군가는 그 의문과 의심들을 수긍하고 때로 반박하며 다시 기록할 의무가 있지 않은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단재 선생의 말을 거창하게 들먹이지 않아도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 한 방편으로 이 마을 터줏대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 각자가 들려주는 마을사와 개인사를 되도록 가감 없이 기록하고자 하였다.‘기억은 시간의 집적물인 동시에 시간의 희생물’이므로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들이 기억하고 들려주는 이야기에 어쩌면 얼마간의 오류와 주관이 개입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괴정리에서 살아온 괴정리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장 진실하게 들려줄 사람도 그들 밖에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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