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시 공동 기획연재] 2018 안동·예천 근대기행(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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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풍북면 소재지 괴정리
괴정(槐亭)이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라면 가보지 않아도 동목으로 지정될 만한 거목이 한 그루쯤 있겠거니 짐작이 간다. 안동시 풍산읍 괴정리 역시 수령 500년 가까운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동네 뒷산 비탈에 우뚝한 마을이다. 느티나무는 팔십여 년 전에 사라진 이름 하나를 또렷이 기억한다. 바로 ‘풍북’이라는 행정명칭이다. 이 마을이 ‘풍북면’의 중심 마을이던 시절에 경험했던 볕의 맛과 바람 소리와 계절의 감촉들을 마주할 때 마다 나무는 그 때의 기억을 선명하게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를 살던 사람들은 현재에 없고, 여기를 사는 사람들은 지금 만을 기억하므로 ‘풍북’이라는 이름은 이제 마을 초등학교와 교회 이름 속에서만 호명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북면의 중심이었던 괴정리는 굵직굵직한 마을의 변화들을 몸소 겪어내며 여전히 건재하다. 마을과 사람들의 기억을 빌려 얼마간은 잃어버렸던 이 마을의 시간들을 다시 불러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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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정리 지도(출처: 안동시)
 
괴정리는 원래 풍산현(豊山縣)에 속하였으나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안동군 풍북면(豊北面)에 편입되었다. 1914년 부·군·면 통폐합에 따라 괴정동(槐亭洞), 발산동(鉢山洞), 수박동(水礡洞), 신사동(新寺洞), 매곡동(梅谷洞), 오미동(五美洞)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괴정동이라 하였다. 이후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해 풍산면에 편입되고, 1995년 안동시·군이 통합되면서 행정구역이 다시 안동시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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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북면 괴정동 원도 1914년(출처: 국가기록원)
 
1913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서 실시한 안동군 풍북면 괴정동 토지조사부를 통해 당시 풍북면 괴정동 토지 현황을 살펴 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괴정동의 토지는 모두 927필지 707,914평이다. 이 가운데 전은 526필지 300,276평이고, 답은 322필지 273,587평, 대지는 38필지 11,445평, 임야는 17필지 110,017평, 분묘지는 24필지 12,589평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유자별로는 국유지가 임야 10필지 65,034평이고, 나머지는 모두 민유지이다. 괴정동의 민유지 총 소유자는 254명이며, 이 가운데 괴정동을 주소로 한 소유자는 50명, 괴정동 이외의 소유자는 204명이다. 괴정동 소유자의 성씨별 분포는 모두 15개 이상으로 권씨 3명, 김씨 10명, 박씨 8명, 신씨 4명, 여씨 7명, 이씨 2명, 장씨 3명, 조씨 2명, 최씨 3명, 황씨 2명 강씨·주씨·양씨·임씨·홍씨 각 1명 등 아주 다양한 성씨로 구성되어 있다. 
 
괴정동은 갓뒤(갓디·지북枝北), 뒷절(후사後寺), 까칠개(가칠게·작평鵲坪), 개상골(채상곡採相谷, 개쌍곡介雙谷), 바래미(발산鉢山), 절뒤, 솥절(솟절), 영뱅이(영배이, 영광), 수박골, 도로변(도롯가) 등으로 불리는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30개 이상의 성씨가 거주하고 있는 전형적인 이성잡거촌(異姓雜居村)이다. 2016년 통계에 의하면 190세대에 남자 179명, 여자 181명, 전체 260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괴정리의 자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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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절 표지석
 
뒷절·후사(後寺)
갓뒤 마을과 접해 있다. 1500년경에 이곳에 절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절 뒤에 있던 마을이라고 해서 뒷절 또는 후사(後寺)라고 한다. 괴정리마을회관이 있는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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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칠개(가칠게) 표지석
 
까칠개[가칠게·작평(鵲坪)]
400여 년 전 안동 권씨들이 들어와 터를 잡은 곳으로 마을 앞에 있는 넓은 들판은 매곡천과 괴정천이 합수되는 지점이라 비만 오면 물에 잠겨 웅덩이가 되었다고 한다. 바로 이 들 옆에 있는 야산에는 늘 까치 떼가 모여들어서 까칠개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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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칠개(마을 뒤로 경북바이오산업단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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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상골
 
 
개상골[채상곡(採相谷)·개쌍곡(介雙谷)]
갓뒤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채상(개상:시루에 콩을 넣어 콩나물을 기를 때 시루 위에 걸치는 'V'자형의 나뭇가지)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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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솥절
 
솥절[솟절, 소사(小寺), 정사동(鼎寺洞)]
갓뒤 북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조그마한 절이 솥발처럼 세 곳에 있었다하여 솥절이라고 하며, 1500년경에 한 선비가 상주(尙州)에서 이주하여 마을을 개척하면서 정사동(鼎寺洞)이라고도 했다고 전한다. 작은 절이 있었다고 소사(小寺)라고도 한다. 1986년 소개령에 따라 다섯 집 주민 모두가 갓뒤로 이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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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솥절
 
영뱅이[영배이·영광]
갓뒤 남쪽 오미들 건너편에는 오래 전부터 주검을 모신 공동묘지가 있었다. 이 공동묘지가 두 갈래로 나뉘어 산 능선에 자리하고 그 사이로 난 골짜기를 영(靈)을 모신 곳이라 해서 영뱅이골이라고 불렀다. 이 골짜기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마을을 영뱅이라 했다. 지금은 도청으로 가는 길 왼쪽 가구점 부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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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박골 버스정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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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박골
 
수박골
풍산읍 괴정리와 예천군 호명면 직산 1리 재궁마와 고개를 사이에 두고 경계하고 있는 마을이다. 예부터 이 고개는 번개탄을 만드는 숯 공장이 있어서 항상 연기가 피어오른다고 굴뚝고개라 불렀으며 마을 이름은 수박을 닮은 수박바위가 마을에 있다고 하여 수박골이라 한다.
 
도로변[도롯가]
안동에서 예천 간 도로 양쪽으로 있던 동네로 34번국도가 신설되면서 사라졌다. 마을 규모가 커서 점방 3개, 이발소, 미장원, 식육점, 정미소 등이 있었다.
 
괴정리의 터줏대감들
괴정리는 지금은 풍산읍에 편입된 옛 풍북면의 중심 마을로 풍산에서 예천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통과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따라서 정미소, 양조장, 잡화 가게 등이 일찍이 들어섰다고 한다. 각성바지 마을로 주민들의 협동심이 강해 새마을운동이 한참이던 1974년에는 안동군에서 최초로 자립마을로 선정되어 대통령 하사금을 받기도 하였다. 1994년에 준공된 풍산농공단지와 2010년 준공된 경북바이오산업단지, 경북도청과 인접한 입지 등이 마을 주민들의 생활에 미친 영향과 마을 이름의 유래인 괴정리 보호수와 얽힌 이야기, 마을에 전해 오는 옛 풍북면의 이야기들을 마을 터줏대감들의 구술을 통해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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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순, 김종진 부부
 
# 괴정리 이장 13년 김종진
청년 시절에는 동 서기로, 퇴직 후에는 이장으로
김종진 : 1948년생, 본관 김해, 풍산읍 괴정리 출생
 
12개의 산재 부락이 있던 마을
 
우리 마을은 안동 예천 간 34번 국도를 가운데로 양 갈라서 이쪽저쪽 동네가 산재 부락이 12부락이 있었어. 경북바이오산업단지를 조성하면서 한 20호 가량 되는 한 개 반이 이주를 다 해부랬어. 한 개 반이 없어지고 또 요 너매 가마, 등 너머 솥절이라 카는 동네는 맷 가구 안 살았는데 옛날에 정부에서 외딴 골에 사는 사람들 큰 동네로 소개(疏開)를 시켰어. 또 그때 한 반이 없어지고 지금은 열 개 산재 부락으로 돼있고. 이쪽으로 몇 개 동네 사람들은 시내버스가 없어 도보로 걸어 나왔으니까 이 마을이 중심이랬는 택이래. 갓뒤가 지북이래. 요 등 너매 마을회관 있는 데는 후사, 뒷절. 절 뒤라고 후사라캤지. 솥절, 바래미가 산업단지 들어와서 없어졌어. 김휘동 시장 있을 때 날 보고 어쨌든 사람들 딴 데 못가도록 붙들어라 캐가지고 이걸 조성을 했는데 반은 가뿌고 반은 여 살고. 바래미는 터가 없어졌지. 바래미가 반이 여기 왔지. 솥절은 소개 당했는데. 정부에서 외딴 데 사는 사람들 한 데로 모아서 소개 당해 내려왔고. 옛날에 간첩이 다닐 때 외딴 데 살마 피해를 입는다고 큰 동네 넘어오라고 그런 시절이 있었어. 요즘은 그런 데 별장이지. 도청하고 우리 마을이 경계래. 솥절하고 바래미 두 개 없어져서 지금은 열 개 산재 부락이지. 영뱅이는 영광, 우리는 영배이라 캐. 개상골, 채상곡이라고도 캤고, 농공단지 뒤의 절뒤, 까칠개는 작평, 예천 경계에 수박골이 있고, 도로변도 한 개 부락이랬어. 옛날에는 솥절, 절뒤, 뒷절에 절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지금도 농사 작업 하다 보마 기와도 나오고 그래.
 
30개 성씨가 모여 사는 각성바지 마을
 
성씨는 여기는 집성촌이 아이고 30개 정도 성이 모여 사는 뭐라 그꼬? 아메리카합중국이래. 아무라도 와가지고. 한 성이 모여 사는 데는 이게 타성이 들어가마 발언권도 없고 거 살기 좀 힘들어. 근데 그 씨족끼리 모여 사는데 가마 아재 조카 저끼리 으르렁거리고 싸우더라도 타성하고 언쟁이 붙으마 다 한편이 되뿌래. 그러이 타성이 들어가 살 수가 없어. 그래 우리 마을에는 아무나 와서 자기 처세만 잘하마 대우 받는 동네라. 그래서 이 동네는 성씨가 그렇게 여럿이 모여 살아. 여는 오미처럼 일제시대 독립운동 했던 사람이 있을 마을이 아이고 뭐라 그꼬. 양반 촌도 아이고 상민촌도 아이고 그냥 평민들. 신분 뭐 그런 거 안 따지는 동네니 그래 살기 좋아가 막 끌어모이는 동네래. 괄세도 안받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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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 괴정리 구판장
 
서울이나 부산 가려면 우리 마을 앞에 와서 차를 탔지
여기는 34번 국도를 끼고 있는 동네래가, 지금은 오미 간 지방도로가 생겨가지고 시내버스가 들어가이께네 골골이 있는 오지 사람들이 거 마을에서 버스를 타고 다녀. 그런데 과거에 버스가 없을 때는 오미 1,2리, 풍천 갈전 심지어 서울이나 부산 갈라마 우리 마을 앞 큰 도로에서 차를 타야 돼. 그래 거가 정류장 택이랬어. 손님으로 오고 갈 때 정종도 팔고 잡화가게가 엄청 큰 게 있었어. 장사 잘됐지. 터가 저 건네 있는데 지금은 그 집이 다 허물어져 부랬어. 빈 공터만 있고. 인제 모여드는 데기 때문에 양조장도 있었고 또 정미소도 여기 두 개랬어. 명도 타고 옛날 정류소 격이랬어. 태호네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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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 괴정리 경로당(구판장과 경로당은 한 건물에 나란히 붙어있는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씨름에 져서 풍산으로 넘어간 면소재지
원래 우리 동네가 조선조 고종 때 풍북면이랬어. 그런데 한 80년 전에, 1934년도에 대대적으로 작은 읍면들 통합하면서 행정 개편이 되면서 풍산으로 편입이 될 때 서로 소재지를 안 뺏길라 칼 거 아니래? 그래 제안을 어예 했냐면 씨름으로 하자. 풍산서 5명, 풍북서 5명 뽑아서 요 앞밭에서 씨름을 했는데 조건이 어예 되냐면 이기는 면이 소재지를 가주가고 지는 면은 소재지를 뺏기는 대신에 면장을 연임을 할 수 있도록 이래 조건을 달았는데 풍북면이 연습도 소홀하고 해서 고마 져부랬어. 져가지고 그게 풍산읍이 됐다는 말이 전해와. 옛날 풍북면사무소도 안주 그 자리에 고대로 보존 돼 있어. 지서는 뻐져가 없고. 그 집이 그대로 있어. 들어오다가 기와집. 그게 얼마 안 돼. 뺏긴지가. 파출소 우물이 있었는데 우리 마을에 속상한 어르신이 그 우물가에 신을 요래 놔놓고 돌아가셨다고 마을 어르신들한테 들은 얘기들이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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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풍북면사무소 건물과 집주인 이경직씨(현재 풍산읍 소방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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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정리 산62번지에 자리한 괴정리 느티나무(1982년 안동시 보호수로 지정, 오래전부터 마을 당목으로 모시고 있다. 수령은 정확하지 않으나 500년 정도로 추정한다.)
 
매혼한지 7년 된 괴정리 보호수
마을 이름은 괴정인데 바로 우리 집 뒤에 수령은 정확히 아는 이는 없고 한 500년 되는데 그 나무 이름을 따가지고 괴정동이라. 동제를 사무 지내다가 십 몇 년 전에 이거 뭐 지금 시대에도 안 맞다 캐가지고 매혼(埋魂)을 해서 안 지내니까 그해 마을에 참사가 막 생겨. 젊은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고 하니까 마을 어른들이 아 이거 동제를 안 모시서 그렇다 해서 다시 부활을 했어. 내가 이장을 13년을 하면서 쭉 하다가 보니까 동제를 지낼 때는 아주 깨끗한 집에 제관을 선정해야 되는데 늦게 가니까 그걸 할 사람이 없어. 그래가지고 이 사람(김용순)하고 나하고 수년을 장 봐가지고 준비를 해가지고 어떤 해는 음력 정월 보름에도 눈이 이만큼 빠지는데 올라가 지내고 몇 해를 해보이 도저히 힘들어 못해가 내가 동네에 선언을 해서 매혼을 한지 7년 쯤 될라. 그래 지금은 동제 없애 부랬어. 매혼을 해 부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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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하사금으로 지은 우사1(갓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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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하사금으로 지은 우사2(수박골)
 
 동군 최초의 자립부락으로 대통령 하사금을 받다
70년대 초에 우리 새마을 사업 한창 할 때 그때 우리 마을이 안동군에서 최초로 자립부락이 됐어. 새마을 사업을 잘했어. 단합이 잘된 동네라 이 동네가. 자립부락으로 선정도 되고 대통령 하사금도 받고 그랬는데 그때 가구 수나 지금이나 거의 비슷해. 이 동네는 폐가가 거의 없단 말이래. 다른 오지 촌 동네 가믄 빈집들이 많잖애? 여는 빈집 거의 없어. 그 당시에 190 몇 가구랬는데 지금도 180 가구가 넘어. 농공단지나 산업단지 때문에 집이 비면 살러 들어오고. 우리 마을은 단합이 잘돼. 1974년에 안동군 최초로 자립부락에 선정 되면서 하사금 받아가지고 우사 지은 건 아직 그대로 있어. 수박골 석한씨 집 앞에 한 개 있고 지훈공업사 옆에 마구도 하사금 받아서 지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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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닭발공장(30여 년 전 두 개의 닭발공장이 들어와 가동 중이다.)
 
닭발공장에서 번 돈이 벼농사 1년 소득보다 많았다
여는 다른 동네처럼 특수작물을 할 줄을 몰래. 누가 선구자가 없어가지고. 그러니까 경제가 상당히 쪼들리고 빈곤했어. 요 부근에 가내 공업인 닭발 공장이 한 30년 전에 들어왔는데. 바로 뒤에 두 집이 오면서, 이거는 누가 기술도 필요 없고 능력도 필요 없고 하는 만큼 돈을 받아가기 때문에, 시간도 제한이 없고 아침, 새벽에 가도 되고 밤늦도록 해도 되고 그렇기 때문에, 연세 많은 안어른들도, 칠십 팔십 나는 안어른들도 안 놀고 그 공장에 나갔어. 한창 번성할 때는 한 80여명 일을 했어. 그 소득이 1년에 우리 마을에 벼농사 해가지고 수매한 소득보다 더 많앴어. 그런 게 없을 때는 아침에 아들 차비도 없어가지고 이웃집에 빌리러 다녔는데 그거 하면서부터 전부 경제적 여유가 생겼어. 통장에 돈도 소복소복 들고, 근데 인제는 근력이 딸래가 못해가지고 지금은 한 집에 30명 되나. 그래 후임들이, 뒤에 인력들이 이제 젊은 사람들은 그런 걸 안 하잖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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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산농공단지
 
농공단지와 산업단지가 들어오다
농공단지 원래 취지는 농촌의 유휴인력을 이용하고 우리 농민들은 농외 소득을 얻고 이 목적 이랬는데 해 놓고 막상 일 하러 가니까 나이가 많다고 안 써주고 사실 그거는 취지가 안 맞고 이런 게(닭발공장) 오히려 마을 경제를 살렸지. 여가 지리적으로 모여드는 데다 보이 70년대만 해도 한 집에 5,6남매 될 때는 인구가 900명 정도 됐는데 지금은 1인 가구도 많고 그래도 남녀 400여 명 돼. 빈집도 거의 없고. 농지는 산업단지하고 농공단지하고 거 수용 되면서 반 이상 줄어뿌이께네. 지금 농사 소득은 별로 없고. 안어른들은 닭발하고 사랑어른들은 정부에서 주는 쪼맨한 보조금 가지고 그래 살지. 노령연금이라든가 뭐, 이자 붙어서 25만 원 정도. 산업단지는 젊은 아들은 고용이 좀 되는데 일부고. 농공단지는 거의 없다고 봐야지. 그 당시는 촌에 인력이 있는데 막상 가니까 조건이 전부 안 맞아. 나이도 많다 그고. 오히려 환경만, 공기만 나빠. 주민들하고 갈등만 자꾸 생기고 이랬어. 지금은 산업단지는 기업들이 오마 사회적 기업이라 이래 가지고 그런 거만 유치가 되면 아주 고마 예산이 주변 지역에 발전기금도 좀 주고, 도와주라는 예산이 있어. 남부발전소는 괴정서 일 년에 정기적으로 지원 받는 게 2천 몇 백 만원, 행사시에도 도움을 받는 그 정도지 뭐. 당시에는 (산업단지)강제 수용이지. 주고 싶어 주는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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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바이오산업단지
 
경북도청과 인접하다
도청이 생기면서 달라진 건 촌에 당장 팔아 쓰지는 못해도 재산은 좀 증식이 됐을 거고 또 그 당시에 농가에 부채가 한 1억만 되면 못 갚아. 농사지어서는 도저히 못 갚아. 그래 파산 위기에 있던 농가 몇 집이 도청이 들어오면서 해결이 되고 그리고 또 아주 나쁜 얘기는 형제간에 자매간에 금이 다 가뿌고 제사 지내러도 안 오고 뭐 그런 악영향도 있고. 다른 거 뭐 아직 도청이 와서 생활 하는데 편하고 이런 건 아직 못 느끼고. 우리도 도로 옆에 우사가 있었는데 같이 편입이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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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진씨 옛집. 신혼살림을 시작하고 맏이 은미씨를 낳은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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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진씨 옛집의 현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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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진씨의 현재 집
 
13년간 이장 역임
이 동네가 괴정서 최고 큰 부락인데 갓뒤라 그래. 지금 한 50호 되는데 기와집은 딱 한 집, 이 집이 유일하게 있었고 다 초가집이랬어. 괴정 살 때 결혼 해가 직장 따라 댕기다가 1999년도 명퇴해가지고 들어왔지. 고향이래. 그게 하매 20년이다. KT, 한국통신 다녔지. 이 사람(김용순)은 1952년생 용띠고 안동김씨래. 가일 출신. 1973년도에 결혼했어. 1974년 직장 따라 안동 시내로 나가서 용상 살다가 이사를 열두 번도 더 했지. 맏이 은미는 여기 할매집 와서 낳았지. 은미를 낳은 우리 헌집이 여 아직 있어. 아랫방에서 낳았는데 아래 칸이 아직 그대로 있어. 풍산, 서후, 안동 거쳐서 1986년도 영덕으로 옮겨 가서 13년 있었지. 99년도 퇴직하고 집에 와가지고 백수 생활 했지. 2003년부터 2016년까지 13년 이장을 했어. 지금은 괴정리 노인회장이고 게이트볼회장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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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정리에 남아있는 옛 창고
 
새마을운동 때 마을 동 서기를 맡았지
내가 결혼할 당시에는 우리 동네 동 서기를 했어. 우리 마을이 자립부락이 된 게 새마을 사업 할 때는 우리 동네가 억수로 컸는데 인구도 근 천여 명 됐는데 하여튼 사업에 전부 미쳤었어. 남의 담 다 밀어놓고. 원래 골목길도 소 구루마도 못 댕겼어. 그때는 남의 의사도 물어보지도 안하고 갈구치는 거, 담이고 뭐고 다 밀었어. 담을 싸고 안 싸고 본인들 의사는 필요 없어. 동네에서 공동으로 브로크(콘크리트 블록)를 벗겨가지고 바깥에 싸고 막 이랬어. 그 때 내가 총각 때 이 동네 청년들이 한 팔십 명 됐어. 청년 회장도 하고. 그래가지고 새마을 사업 한창 할 때 동네 일이 원체 많으니까 동장이 혼자 감당이 안대이께네 내가 보조로 총각 때 했어. 행정보조, 그 때는 월급이 없고 일 년 되마 동네서 잘 사는 집은 나락이 얼마, 못 사는 집은 좀 적게 현물로 받았어. 결혼하고 직장 들어갔지. 자립마을 이야기를 하자면 그 때는 요즘처럼 장비도 없고 삽으로 길 닦고 지붕 이고 할 땐데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면 일상이 들에 가서 일을 해야 하는데 마을에서 시간만 나면 부역 나오라 하니까. 마을에서 길 닦는데 같이 해야 되고. 그 당시는 기계화도 안 되어 있고 전부 인력으로 논매고 모 심으고 해야 되는데 일철에 들에 가야 되는데 마을 일도 해야 하고. 마을에 수동으로 하는 사이렌이 있었어. 그래 내가 점심 먹고 뒤에 동산에 올라가주고 사이렌을 막 잡아 돌리마 빨리 일 하러 삽 들고 나오라는 이야기래. 이 사람들은 사이렌을 돌리마 들에 일하러 가야 될 시간이래서 안 나오고, 길로 안가고 멀리 산속으로 숨어서 들에 가. 그래 일 할 사람이 없잖아. 그러마 나는 사이렌을 돌리고 동장하고 새마을 지도자는 산 길목에서 지키. 도망가는 사람들 붙들어. 그 당시에는 거의 강압이래. 그래 해야지 뭐. 동네 남의 담은 다 밀어놨지. 빨리 정리해가주고 반듯하게 해야 되재. 전부 뭐 요새는 포클레인 있는데 사람 쓸 일 뭐있나. 인력으로 다 했으니까. 다른 동네도 열심히 했는데 여기보다 적극성이 없었지. 이유가 여기는 전부 30개 이상 각성이 살기 때문에 서로 견제를 해. 집성촌에 가마 이장이 아재면 조카가 삐딱하게 해도 아재가 강제를 못하지만 이 동네는 그게 안 되고 김 씨가 이장을 하마 다른 성이 안도우마 옆에서 이야기를 해. 자네 그러면 안 된다. 협조해야지. 이런 분위기기 때문에 일이 잘되고 당시 이장이 박씨랬는데 아주 정열적이랬어. 열성적으로 집의 일 전폐해가면서 했다니까. 지금은 돌아가셨어. 그래서 일찍 자립부락으로 선정 되고 도지사 오고 그랬지. 그 당시 리어카가 최고 장비래. 밥만 먹으면 가서 일했는데 그 당시 작업하는 사진 그런 거 찍어놨으마 좋지. 전혀 없지 뭐. 길도 요랬는데 넓히놨는 거 있으마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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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정창고
 
안동시 공공 비축 벼 매입의 시작 서안동농협 괴정창고
집 앞에 창고 이거는 농협에서 짓지. 그때는 창고가 이 마을에 큰 거 대형 있었는데 이 부근 비료를 이 동네에서 다 가 갔어. 그걸 이제 농협에서 관리하면서 뜯어뿌고 마을회관을 짓지. 그거 우리 마을 창고랬어. 큰 게 있었어. 이 창고가 안동시 공공 비축 벼 매입 시작되는 창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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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이트볼 경기장에 모인 회원들
 
동네 뒷산에 만든 게이트볼 경기장
동네에 게이트볼장이 있어. 얼매나 잘해놨다고. 안동보다 시설 더 좋아. 위에 비 가림까지 전천후야 지금도 가면 사람 열 몇 명 정도 있을 걸. 어르신들이 경로당에 모이면 화투 치고 술 마시는 거 말고는 마땅한 놀이가 없었어. 청송에 가다이깨네 어른들이 곰배자루 같은 걸로 뭐를 치더라고. 뭐하는 거냐고 물어보이 게이트볼이라 그래. 한참 재미있을 때는 자다도 천장에 공이 왔다 갔다 그래. 그럼 그걸 한번 해가지고 경로당에 노인들을 밖으로 나오게 하자 싶었지. 그때 2005년돈가 시의회에 얘기해서 읍사무소 담당 과장을 만나서 게이트볼 경기장 만드는 예산을 받아서 장비로 터를 닦아 시작을 했어. 처음에는 맨땅이랬어. 좀 있다보이 천연잔디를 깔아서 모두 하더라고. 그래 천연잔디를 깔아 달라 했지. 인제는 전부 인조잔디래. 인조잔디하고 위에 축 쌓고 뚜껑하고 지원을 받았어. 운영비는 일 년에 회원이 연회비 5만원 내마 그만이고, 동네에서 일 년에 어른들 잘 노시라고 240만원 지원해주고 모든 행사 같은 거 할 때 사회적 기업인 남부발전소 같은 곳에서 도와줘. 대회도 마이 나갔지. 제주도도 갔다 왔는데. 성적은 도지사기도 두 번 일등하고 입상 마이 하지. 트로피도 한정 없어. 2005년도 도지사기 우승한 사진도 있어. 여자 회원들도 몇 분 있었는데 거는 안즉도 일도 좀 하고 해서 잘 못나오고, 좀 있으마 우리 집사람부터 데리고 갈라 했는데 저 아(외손자) 본다고 안가지. 이 사람 나오마 따라 올 사람 좀 있는데, 나이 많은 이 운동으로는 딱 맞아. 과격하지도 안하고. 연합회 회원이 400여명 되는데 내가 수석 부회장으로 있어. 정신 팔리면 정월 초하룻날도 제사 지내고 도시락 싸와가지고 거 와서 쳐. 골프는 우리는 수준에 안 맞고 경비도 좀 있어야 되고. 이거는 경비 십 원도 필요 없어. 옷도 우리 예산으로 해. 촌에 노인들이 수입이 없잖애. 예산 만들어서 츄리닝이고 모자고 다 사줘. 마을 회관에는 안어른들만 모이고 바깥어른들은 전부 게이트볼장으로 모이. 마을회관에서는 저녁을 해먹고 해산해. 게이트볼 회원이 24명. 매일 나와.
 
이 동네가 형성될 때 뿌리를 누가 먼저 와서 터를 잡았는지 그거 조차도 명확히 알지를 못해. 왜냐하면 여러 성이 흘러가다 들어오고 흘러가다 들어오고 하니까 원 뿌리를 잡은 사람이 누군지 몰라. 아까 얘기했다시피 집성촌에 살아보이 내 발언권도 없고 괄세만 받고 하니 몰려드는 사람도 있고 또 교통편도 좋고 최근에는 그래도 여 오마 벌어먹을 데가 있으이 빈집이 덜 생기고 하는 그거 뿌이 모르지. 500년, 400년 전에 누가 어느 성씨가 이 동네서 터를 잡았는지 아무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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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경도씨
 
# 움쩍거리는 건 다 기록했던 최경도
아깝다, 30년 일상 달력에 기록했었는데
최경도 : 1936년생, 괴정리 출생
 
우리 동네는 살아온 과정이 농사만 짓고 없이 살아온 동네가 되다보이 마을 기록이나 그런 관심을 둘 형편이 못됐어. (박)한철이 삼촌 거도 씨름 했는데, 선수가 다섯이랬지. 그런 사람들도 관련된 사진이나 자료는 아마 없을 거야. 씨름 했던 어르신들은 다 돌아갔지. 살아계시면 다 백 살이 넘을걸. 나도 곧 그 나이가 다가오지. 솥절이라 카는데 여 가마, 여 동네가 솥절, 절뒤, 갓뒤, 뒷절 뭐 이래 있는데 거 가마 여씨들이, 여진사 여덕형이라고 살았다는데 과거 거 났다 그래. 그 집을 내가 뜯었단 말이래. 사진을 찍어놓고 그런 건 못했단 말이래. 옛날엔 돈이 없으이 흙으로 담을 쌓아올리고 떼를 위에 올리고. 그때 나무가 굉장히 귀했던 모양이래. 아주 초가집이랬거든요. 집도 못 지가지고 서까래는 썩어서 굼벵이가 나오고. 그런 것도 보관이란 것이 없고. 그런 거 찍어 놓으마 여기서 여진사가 났다 그럴 건데. 이 동네는 주로 보면 평산신씨들 산이 저 건너에 있고 묘도 왕봉도 있고 부동산이 제일 많고 해서 신씨들이 제일 미리 들어왔지 않나 싶은데 돌아가신 어르신들한테 또 물어보면 장씨도 들어왔다 하고 하니 몰래. 저 나무, 보호수도 예측에 칠백년이라고도 하는데 확실한 근거도 없어요. 우리도 오래 된 어른들한테 물어봐도 거도 모르고 여기는 30여개 성이 살고 있단 말이래요. 일절 정확한 근거가 없어요.
 
나도 달력에 한 30년 간 메모를 했다가 몇 년 전에 다 태웠어요. 모든 농사 계획이라든지 하루 움쩍거리는 걸 다 썼었는데 오래 되니 지저분하고 해서 다 태우고 없앴어요. 나중에 며느리가 아버님 살아오신 과정을 왜 없앴냐고 그래요. 우리네는 못 배운 사람이래요. 나는 일정 시대 때 풍북국민학교 3년 다니다가 열네 살에 졸업 맞고 평생 이래 농사만 짓고 사는 사람이래요. 먹고 살기 어려우니 입에 밥 밖에 중요한 게 없어요. 일본 글 배우다가 해방 되고 다시 한글 배우다가 열네 살에 졸업 했으이 이도 저도 옳게 배우질 못했어요. 졸업장으로 취직을 할 수 있니겨. 지저분해서 다 없앴지. 우리는 최간데 높을 고에 메산을 썼어요. 6.25 휴전 되고 막바로 군대에 갔는데 이승만 대통령 할 때래요. 못 먹어서 얼굴이고 뭐고 붓고 영 형편이 없었어요. 요사이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이래 긁으마 손톱 밑이고 어디고 온 천지에 이가 가득했는데. 자유당 때 우리 삶은 지금 젊은 사람들은 상상도 못해요. 하늘과 땅 차이래요. 우리 조부가 가졌던 이야기책이 한글 위에 별의별 토가 적히 있었어, 말본이 있었는데 볼만도 했는데 귀가 닳고 노래서 다 없앴어. 지금 있으마 들고 나올 낀데 아깝더라고. 농사 지어가마 도로 공사 할 때, 처음에 내가 기술직으로 들어갔어요. 그때 기록도 있었는데 다 없애고 없어요. 그래서 최근에 다시 쓰고 있는데 9일 게이트볼 회에서 행사날 개 잡는 것도 기록해 놨다 카이. 내년도에 내가 살란지 안살란지 모르겠지만 다 적어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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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천이 고향인 김옥수씨
 
# 예천 감천서 시집 온 김옥수
대통령 하사금 받은 우사가 있는 수박골
김옥수 : 1937년생, 본관 김해, 예천군 감천면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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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박골 공동 우사(‘74. 대통령 각하 하사금 공동우사’에서 ‘공동우사’를 제외하고 나머지 글자가 지워져 있다.)
 
마을 입구 우사가 우리 우산데 시삼촌이 소를 여남은 마리 먹있거든. 근데 연세가 많으이 못 먹이잖아. 그래 우리가 먹있지 뭐. (1974년 대통령 하사금 백만 원을) 동네로 넣었을 거래요. 원래 땅이 우리 땅이래 가지고 나는 얘기만 들었어. 그래 저 밑에 조씨 어른하고, 그 어른 돌아가싰고 그 두분이. 하여간 시삼촌이 백만 원 탔다고 그래요. 시삼촌이 하다가 동네로 하자 그래 가지고 했는데 그게 우리 해 거든. 시삼촌 돌아가시고 우리가 소를 먹있어. 먹이다가 우리가 딴 데 우사를 지었어. 하도 오래 되가지고 지금은 다 허물어지고 안 쓴지가 한 50년 안넘을리껴. 내 시집 와가지고 먹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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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박골 공동 우사(소를 먹이던 당시의 농협사료 봉투가 그대로 남아있다.)
 
수박 안하는 수박골
수박골에는 한 7가구 사는데 뭐 하나씩 사는데 뭐. 우리는 아들하고 같이 사이께네 농사 다리보다 조금 더 마이 짓고 논밭가리 한 100마지기 지으께네 아들을 데리고 누구 하나 붙들어야 되거든. 우리만 그렇지 여기 모두 집집마다 하나씩 살아. 옛날에 저 수박바위가 있어가지고 그래 수박골이라. 여 수박 하도 안하는데. 저 짝 건네편에 옛날에 바위가 수박 같이 있어가지고 그래. 지금은 있는가 몰래. 나도 말만 들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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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과 안동의 경계 수박골
 
예천군의원 후보들이 선거운동 하러 오기도
여기가 예천하고 안동하고 경계지. 예천 군의원들 나서면은 선거운동 하러 더러 모르고 여기 올 수 있어. 여기는 안동 땅인데요 그러면 가뿌래. 안동 사람들은 직산에 안 가는데 예천 사람들은 여기가 분기래께네 더러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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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 우사 뒤로 보이는 김옥수씨의 2층 집
 
한국전쟁 폭격으로 사라진 옛집
6.25 사변 때 우리 기와집을 잘 지가지고 있을 때 인민군들이 거 살림을 사이께네 동네 폭격 당해가지고 새로 짓고 그래요. 저 짝은 6.25 사변 때 지 가지고 우리 살던 집이고 이 집은 인제 지은 지 3년 돼요. 지붕은 개량했지. 저 짝 창고는 옛날에 누에 먹이느라고, 누에 스무 장 먹이느라고 가지치기 하느라고 그건 아직 안 뜯고. 창고는 딸이 지금 마흔 여덟 나니 한 45년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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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집을 짓기 전까지 살던 한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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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3년 양잠창고를 뒤로 하고 마당에 선 김옥수씨
 
예천 감천에서 달성서씨 집안으로 시집 온지 60년
결혼한 지 한 60년 됐으이끼네. 내가 팔십 하나 께네. 스물에 왔으이께네. 호적에는 안즉 77세고 1937년생 김해김이래. 나는 예천 감천에서 왔어. 이거는 내가 예천 감천중학교 다닐 때 사진. 이쁘다꼬? 뭐 이뻐요. 이젠 다 늙어빠졌지. 이건 내가 감천국민학교 다닐 때. 쪼매나지 뭐. 이거는 우리 결혼 때 가족 끼리 찍은 거. 내 결혼식 때 택시 사진이지. 이게 뭔 택시라더라. 택시는 대구에서 왔어요. 둘째 시삼촌이 서성창이라고 대구에서 태양방직회사 했으니까 보내줬지. 방직회사가 엄청 컸지요. 이거는 시삼촌이 뭐 어째서 어데 갔다 올 때 찍었다던가, 사상이 틀려가지고 그런가. 나는 내용은 잘 모르겠어. 둘째 시삼촌은 대구로, 셋째 시삼촌은 여기, 나머지는 서울로 다 갔어. 결혼식은 예천 감천 친정에서 했지. 한 달 있다가 묵신행 해서 왔지. 풍북국민학교 졸업사진은 우리 주인 사진이지 싶다. 바깥어른은 서진표, 1937년생이께네. 원래 한 동갑이래. 팔십 하나. 나는 호적으로 40년생, 원래 동갑인데 내가 호적을 늦게 했지. 주인은 달성서씨래. 서씨들이 이 동네 몇 집 살고 괴정에도 한 집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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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천국민학교 시절 김옥수씨(앞줄 맨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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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천중학교 시절(두 번째 줄 맨 오른쪽이 김옥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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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북공립초등학교 시절 남편 서진표씨(1951년 7월 풍북공립국민학교 제6회 졸업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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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진표·김옥수씨 약혼(1957년 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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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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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식 날 대구 택시(예천 친정에서 결혼식 후 태양방직회사를 운영하던 시삼촌이 보내준 대구 택시, 장식이 화려하다.) 뒤로 제일약방 상호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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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방직회사를 운영했던 시삼촌 서상창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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