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의 기틀을 다지다 ‘경학사와 신흥강습소’

한국국학진흥원과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은 만주망명 110주년을 맞이하여 총12회에 걸친 기획 보도를 진행하고 있다. 6편에서는 독립운동을 위한 기지 건설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만주망명 1세대들의 피나는 노력을 되짚어본다.

고산자 신흥무관학교 터

죽음을 무릅쓴 고난의 망명길에 오른 독립운동가들의 궁극적 목표는 한인 동포사회의 결속을 다지면서 안정을 이루어 무장 항일투쟁 등 독립운동을 지속할 수 있는 기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백하 김대락 선생과 석주 이상룡 선생 등은 경학사와 같은 자치 기구를 설립하여 동포사회의 구심점을 만들고, 신흥강습소와 같은 학교를 세워 역사와 교양 등의 지식을 보급하면서 군사훈련을 병행하여 독립운동의 중견인재를 양성하고자 했다.

경학사는 서간도로 망명한 애국지사들이 최초로 설립한 한인 자치단체였다. 19114월 무렵 석주 이상룡과 우당 이회영 등이 유하현 삼원포 대고산에서 이주 한인 300여 명을 모아 군중대회를 개최하여 경학사를 설립했고, 초대 사장으로 이상룡이 추대되었다.

경학사 취지서(석주유고) 제공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당시 석주 선생이 쓴 <경학사취지서>에는 국권 회복을 위해 자정순국과 같은 소극적 방법보다는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해야함을 역설하고 있으며, 한민족의 단결을 통해 독립을 이루기를 바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런데 결성한지 1년간은 우당 이회영 선생이 가지고 온 개인자금으로 운영을 했으나 지속적 유지가 힘들었고, 특히 척박한 땅을 개척하여 지은 첫 농사마저 흉작이 드는 등 기아와 풍토병에 시달리다가 1913년에 해체되기에 이른다.

신흥강습소(마을강냉이 저장모습) 제공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경학사가 해체된 후 합니하 지역으로 옮겨간 김대락과 이상룡 등은 새로운 조직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부민단을 결성했고, 이는 유하현 · 통화현 · 흥경현 등지에 산재한 동포사회를 통할하는 대규모의 단체로 확대되었다. 부민단의 간부였던 이상룡과 김동삼 등에 의해 병농일치의 둔전인 백서농장과 길남장 등이 개간되기도 했다.

한편 경학사의 설립과 동시에 19116월에는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에 신흥강습소가 설립되었다.

경고신흥학교학생제군-2 제공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신흥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인 신민(新民)’()’자와 다시 일으킨다는 의미인 부흥(復興)’()’자를 붙여 만든 이름이다. 신흥강습소는 신흥학교라고도 했는데, 당시 서간도 망명사회의 최고령자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백하 김대락 선생은 이곳 학생들을 훈계하는 글인 경고신흥학교학생제군을 직접 작성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신흥학교의 교장으로 추대되자 고령이라는 이유를 들어 사양하는 편지(辭學校長書」「再辭學校書)를 두 차례 쓰기도 했다. 그래서 이 학교의 실질적인 운영은 석주 이상룡 선생이 맡았고, 이곳에서 김성로(金成魯), 김성로(金聲魯), 이광민, 이형국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되었다. 신흥강습소는 몇 차례에 걸친 이전을 통해 1919년 신흥무관학교로 개편되었다.

만주 망명과 정착의 고난 속에서 일구어 낸 경학사와 신흥강습소, 이로부터 시작된 1910년대 만주 독립운동의 흐름은 19193.1운동을 기점으로 크게 변모했다.

대한독립선언서 제공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3.1만세운동 소식이 전해졌던 311일 무렵 만주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에 이상룡과 김동삼, 허혁 등이 서명했고, 이후 서간도 지역에도 3.1운동이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부민단을 중심으로 한 서간도 지역의 지도자들은 독립선언 축하식 거행 및 향후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새로운 통일기구를 조직하기 위해 4월 초 유하현 삼원포에 모여 무장투쟁을 위한 군정부를 구성하고, 동포사회의 자치기구로서 민정부 성격을 띤 한족회를 조직했다.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411일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여운형을 군정부에 파견하여 임시정부에 통합할 것을 요청했다.

당시 이상룡 선생은 하나의 민족이 두 개의 정부를 둘 수 없다는 취지에서 통합 요청에 응하여 군정부군정서로 격을 낮춘 뒤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칭했다. 그리고 이는 1920년대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승리를 비롯한 만주지역의 무장독립투쟁의 원동력을 제공한 기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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