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인의 만주망명’ 한국국학진흥원·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110주년 기획 보도

고산자 신흥무관학교 터

1910,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되자 의병운동과 척사상소운동, 혁신유림의 애국계몽운동 등 활발한 구국운동을 펼치던 경북인들 중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만주 망명길에 오른 사람들이 있었다.

석주 이상룡
일송 김동삼

그 대표적 인물이 안동 임청각의 석주 이상룡, 내앞마을의 백하 김대락과 일송 김동삼 등이었고, 이들과 학문·혼인 등으로 연결된 수많은 경북인들이 동반했다.

백하 김대락 선생과 석주 이상룡 선생 등은 정재학파(정재 류치명 - 서산 김흥락, 척암 김도화, 서파 류필영 등)의 문도이면서 혼인관계로 공고히 이어져 있었다.

김대락의 누이 김우락은 이상룡에게 시집갔고, 김대락과 사돈관계인 영덕의 평해황씨 해월헌 문중 일원(황호, 황만영, 황병일 등)도 망명길에 동참했다.

일송 김동삼의 제자였던 진성이씨 문중의 소근 이원일과 그의 집안, 나중에 이원일의 딸 이해동은 김동삼의 며느리가 된다.

또한 석주 이상룡 선생의 사돈집안인 상주의 진주강씨 문중(강신종, 강호석 등), 매부 집안인 영덕의 무안박씨 문중(박경종 등) 등도 망명길에 참여한다.

신흥무관학교 영농모습

학문적으로도 정재 류치명 - 서산 김흥락으로 이어지는 정재학파의 문도들이 속한 문중도 대거 동참하는데, 이상룡 형제와 김동삼 등도 김흥락의 제자였고, 김흥락의 세거지인 안동 금계의 의성김씨 문중(김익모, 김종락, 김연환, 김원식 등), 척암 김도화의 제자이자 서파 류필영의 아들인 동산 류인식과 전주류씨 집안, 예안 흥해배씨 문중(배승환, 배재형 등) 등 수많은 사람들이 망명길에 동참했다.

석주유고를 보면 석주 이상룡은 강제 병합 소식을 듣자마자 송병준과 이용구의 목을 베라고 상소 한 뒤 만한지도를 보며 망명길을 계획했다.

백서농장 가는 길

1910년 가을 무렵 김동삼과 김만식이 이회영과 주진수 등 신민회 인사들이 사전 답사로 다녀 온 서간도 지역에 다녀왔고, 191011월 주진수와 황만영이 찾아와 만주망명 계획을 전달 받고 이를 시행하기 위해 김대락 등과 논의하고는, 제사비용과 어머니 생활비, 문중 진휼금 등으로 사용할 재산을 남기고 노비문서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 도동서숙 학생들에게는 정신을 보존하고 학업에 힘쓰라는 당부를 남겼다.

사서록(석주유고)

이상룡의 재산 처분 과정은 만주망명 이후에도 계속되었는데, 집안에서 전해지는 1913년 임청각 가옥 및 택지·산판 매매 증서나 각종 계약서가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이들은 만반의 준비를 마친 뒤 처음에는 백하 김대락의 아들 김형식과 일송 김동삼의 제자 이원일이 선발대로 출발했다.

이후 1911124(음력 19101224), 김대락과 가족들이 만주를 향해 길을 나섰다. 석주유고에는 석주 이상룡은 음력 191115일에 출발했다고 되어 있으니,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면 191123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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