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시공동기획연재] 2018 안동·예천 근대기행(16)

민트리고개에 남은 옛 금광의 자취

벼트리 마을에서 석평마을을 지나 옛 금광이 있다는 민트리재로 향했다. 석송령을 지나 민트리재로 차를 타고 한참을 올라가니 민가가 하나 나왔다. 집 굴뚝에선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서너마리의 개들이 저마다의 집에서 바닥에 바싹 머리를 웅크린채 물끄러미 손님을 쳐다본다.

“여기서 걸어갑시다.”

더 이상 차로 올라갈 수 없는 비포장 도로였다.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는 날 산길에 들어서니 옛길 그대로의 운치가 흠뻑 남아있었다. 민트리재는 큰 맛질 동북쪽에 있는 고개로 예천군 용궁면 대제리에서 감천면 천향리 석밭으로 넘어가는 중앙즈음에 위치해 있다.

“여기는 혼자 못 오겠네요.”

라고 하자,

“안내 안하면 못 오죠.”

동섭 씨가 말한다. 왜 민트리골이라고 하는지 물었다.

“글쎄요. 어렸을 때부터 민트리골이라고 불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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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트리재 옛길
 
옛날에 과거보러 한양으로 가는 선비들이 미트리(짚신)를 많이 가지고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유래가 있다. 현재는 문치(文峙)고개로 불린다.

한참을 걷다가 보니 깊은 산골짝 오른 편에 굴 하나가 뻥 뚫려 있었다.

“이게 첫 번째 굴이에요. 굴이 내가 알기로는 네 개가 있었는데, 거의 다 막혀버렸고, 이게 젤 커요. 한 40미터 정도 되는 굴이에요. 요 위에도 이런 굴이 있고, 이 밑에도 굴이 있었는데 다 매켜버렸어요. 옛날 어른들 말로 금을 캤다는 소리만 들었지 우리는 보지도 못했고. 맨날 금광, 금광 그랬어. 옛날에는 이 돌 속에 금이 들었죠. 돌을 빠사야 되죠. 돌을 두드려 깨가지고. 아까 집에 있던 그 호미로 옛날에 금을 캤다하더라고요. 우리는 어릴 때 이 굴에 박쥐 잡으러 와보고 했으니까 (굴 위치)를 아는 거죠.”

금광이 언제까지 운영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일제 강점기 때까지는 있었다는 소리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 전에 있었다고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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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금광
 
금광 인근에 동섭 씨의 작은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가 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도 이곳을 많이 드나들었는데, 친구들과 이곳을 이색적인 놀이터로 삼기도 했다고 한다.

“요 굴이 요하나 더 있었어요. 도랑이 나버려서 그렇고. 요 도랑 밑에 굴이 하나 있었는데. 입구가 다 막혀버렸죠. 지금은 사람들이 잘 안다니니까. 농토도 없고. 농토가 다 묵어버렸으니까. 사람도 안다니다보니까 완전 오지죠. 저 위로는 민가도 없으니까.”

민트리재에는 깊은 산이라 길이 없어 보였는데도 옛날 마을 주민들은 먹고 살기 위해 이곳을 많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이 민트리골 안에 또 골 이름이 언골, 무자나무골 이래가지고 골 안에 또 골이 오십 여개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이름이 있었는데 그 골 이름을 나는 잘 모르겠어요. 아부지는 그걸 다 기억하드라만. 옛날에 나무 때고 하자면 무슨 골에 들어가 가지고 나무를 해가지고 온다 그러니까 어르신들이 다 꿰고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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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석대
 
민트리재에서 석평마을로 내려오는 길에 옻샘과 연석대의 희미한 옛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샘물이 겨울에도 얼지 않고. 옛날에 옻이 오르면 그 물을 바르면 나았죠. 시골에 곳곳에 있어요. 그 물의 특징이 여름엔 아주 찹고 겨울에 뜨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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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석대 폭포
 
옛날 마을 어른들은 연석대에 모여 시도 짓고 술도 마시고 풍유를 즐겼다고 한다. 연석대를 한자로 풀이하면 아주 의젓한 자연환경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예부터 가물어도 물이 줄지 않는 샘밭

감천면 천향리 일대는 물과 관련된 지명이 많고 예부터 온천수가 있었다는 유래가 있다. 특히 샘밭은 1775년경 온양(溫陽) 정씨(鄭氏)가 개척한 마을로 마을 어귀에 가물어도 물이 줄지 않고 추워도 얼지 않는 샘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천전(泉田), 온수골(溫水谷)이라고 한다.

조선왕조 실록 1599년(선조 32) 9월 22일 편에 보면 임금이 몸이 좋지 않아 평산(平山)에 갈 것을 희망하면서 조종조(祖宗朝)에도 온양이나 예천에 간 일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조종조(祖宗朝)란 태조~세조조까지로 추측할 수 있다.

“나의 병은 백약(百藥)이 무효라는 것을 의관들이 다 알고 있다. 이제 그 증세가 갈수록 더 깊어져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남들이 온천수로 치료할 수 있다고 한다. 평산(平山)에 신효한 물이 있다고 하니 겨울이 더 깊어지기 전에 지금 혼자 갔다 오려고 하는데 열흘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의당 내신(內臣) 한두 명과 함께 양식을 싸가지고 갈 것이니 어떻게 감히 백성에게 폐를 끼치겠는가? 옛날에도 임금이 목욕하여 병을 치료한 일이 있고 더구나 조종조에는 온양(溫陽)과 예천(醴泉)에 간 일이 있었는데 어찌 경들은 억지로 막는가? 며칠 내에 떠나려 한다”. 원문 : 조종조유 온양예천지행 하경등지강위거야 욕어수일내발행(祖宗朝有 溫陽醴泉之行 何卿等之强爲拒也 欲於數日內發行)」



새마을사업 1호 샘밭다리

샘밭다리는 이 일대에서 석관천을 가로지르는 맨 첫 번째 다리였다. 현재의 천향1교 자리에 있던 옛날 다리로, 새마을사업 1호로 준공한 다리다. 1980년대 후반에 강력한 태풍이 휩쓸고 지나갔을 때도 마지막까지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며 남아있던 유일한 다리라고 한다. 이는 새마을 사업의 기조인 근면‧자조‧협동을 마을 주민들이 오롯이 실천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동섭 씨는 당시 태풍이 어찌나 거셌던지 관에서 놓은 다리도 모두 다 떠내려갔을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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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밭다리 개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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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 어른들이 맨 먼저 다리를 건너는 모습
 
“(여름에 장마기간에) 다리 위로 물이 넘었어요. 이웃에 있는 딴 다리는 다 떠내려갔는데, 그 다리만 용하게 남았더라고. 그거를 그 당시도 우리가 다리 뜯으면서도 그 얘기를 했어요. 새마을 사업 기념으로 이 다리를 남겨둬야 된다고.”

그의 말에서 다리에 대한 마을 주민들의 자긍심을 엿볼 수 있다. 그 다리를 준공하고, 후에 증축하는 과정에도 마을 주민들이 모두 참여했다고 한다. 주민들의 애정이 각별했던 다리일 수밖에 없다. 손수 돌을 나르고, 집집마다 냇가에서 직접 자갈을 골라 준공한 다리였기 때문이다.

“그 다리 놓기 전에는 샘밭다리는 외나무다리였어요. 우리 어릴 때는 큰 나무를 잘라서 외나무다리 놓는 거 부역도 하고 했어요. 외나무다리가 부패되면 교체하고 여름엔 물살이 세고 하면떠내려가는 거고. 가을에 새로 놓고. 주로 보면 그 당시는 8월 15일에 가면 장마가 끝나고 동네 부역을 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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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향1교(옛 샘밭다리가 있던 자리)

지금은 2005년도에 준공한 천향1교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온동네 사람들이 먹고도 남았다는 샘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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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밭마을 전경
 
천향1교를 건너 마을에 들어서니 집 텃밭에서 한창 마늘을 심던 황분애(78), 장규원(82) 두 내외분을만났다. 오늘 따라 외지차가 왜 이렇게 많이 다니냐며 호기심 어린 말투로 말을 건네신다. 이 마을의 지명 유래에 대해서 묻자, 분애 씨의 첫마디가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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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밭아믈 토박이 황분애, 장규원 내외가 마늘을 심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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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센 물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두 내외분에게 샘밭의 위치를 물으니 천향교회 올라가는 밭머리에 있다고 알려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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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향교회 밑 밭머리에 샘밭으로 불리던 샘터자리
 
“교회 언덕빼기 밑에. 이제는 덮어놔서. 앞에도 막아놨어요. 그 앞에 밭이 있어요. 쉼터 지나면 밭머리에 있어.”

장규원 씨는 그 때 당시 샘밭 반장을 맡았다고 한다. 샘밭다리 준공할 때 열일 제쳐두고 매진했다고.

“그때 애 많이 먹었어. 그때는 한창시절이니까. 그때 다리 놓을 때는 장갑도 없이 맨발로 세멘을 만지고 그랬죠. 그때 (이 양반이) 샘밭 반장했어요. 집에 꺼는 다 얼어빠졌는데 보지도 않고.”

분애 씨가 옛 기억을 추억하며 한바탕 웃으신다.

두 내외분의 말을 따라 샘밭을 찾았다. 샘은 이제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않고 물이 나오던 입구도 나무 합판으로 덮어놨다. 사진을 찍고 내려오는데 왼편에 폐가 위에 박넝쿨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까 분애 씨의 말이 생각났다. 한때는 박바가지와 샘밭 물은 마을 사람들의 목을 축이고도 ...마을의 가장 큰 자랑거리였다. 박넝쿨도 예전의 위용을 잃고 그대로 시들어가고 있었지만 제 습성만은 남아 해마다 꽃 피우고 열매 맺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더 이상 샘이 돋아나지 않아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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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밭 옆에 박넝쿨
 
샘밭 남쪽에는 진밭이라는 마을이 있다. 400여년 전에 전주이씨가 처음 들어와 살때 땅이 질다하여 생긴 이름이지만 지금은 마을앞의 하상이 낮아져 질지 않다.



오동향기가 향긋하던 오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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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향2리 오향마을 입구에 있는 동신목
 
천향2리에 속하는 오향(梧香)은 오동나무가 밀직되어 오동꽃의 향기가 향긋하게 풍겨서 생긴 지명이다. 1619년에 이복기의 아들이 유점산을 개척하여 오향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오동나무 몇 그루가 지금도 남아 있고 수석이 매우 아름답다고 하는데, 현재는 오동나무가 남아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갓재미는 오향북쪽 갓재 밑에 있는 마을로 옛날부터 이곳에 갓을 만드는 사람이 살았다고 해서 갓재미 또는 관산이라고 불렀다. 이 마을 뒤 산정에는 갓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이산을 관산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또 오향마을 서쪽 높은 산기슭에는 ‘놋재미’라는 골짜기 마을이 있다. 옛날 지하에서 녹물이 흘러나와 그 녹물로 놋그릇을 만들었다고 하여 놋재미, 놋점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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