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4월 부산포에 침입한 왜군은 조선의 허술한 방비를 틈타 불과 20여일 만에 한양에 입성하였다. 관군은 무너졌고 선조와 조정은 피난길에 올랐다.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과 통신사 보고 등에 안이하게 대처하다가 20만 왜군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태평세월에 젖은 백성들도 전쟁을 잊었던 탓이다.

김휘태(전 안동시 풍천면장)

왜군의 선두부대는 북으로 진격하고 후방부대는 잔류하여 선량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자, 인륜을 져버린 왜군에 충효정신으로 목숨을 걸고 항전하자는 백성들의 자각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군주와 유교를 받들던 조선의 백성들은 충효와 인륜을 목숨보다 귀한 대의명분으로 여겼기 때문에, 하나 둘 의병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유생들이 선두에 나섰다. 덕망이 높은 유학자들이 선봉에서 목숨을 걸고 결사항전을 주도해나가자 수많은 백성들이 대오를 이루어 의병대에 합류하였다. 유생들과 유학자의 대의명분은 국가와 국민의 안위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충효사상의 실천이었다.

5월에 학봉 김성일이 초유사(招諭使 : 전시에 백성을 타일러 경계함)로 나서 경상도지역의 각 유림에 초유문을 보내서 창의(倡義 : 의병을 일으킴)를 독려하였다. 김성일은 퇴계 이황의 고제(高弟 : 학식과 품행이 뛰어난 제자)로서 유림에 영향력이 컸으며, 안집사(安集使) 김륵과 배용길, 김용, 신지제 등이 의거(義擧)하고 의병모집에 나섰다.

그리하여 611일 김해를 대장으로 예안에서 412명의 의병이 창설되어 열읍(列邑 : 여러 지역)에 포고하였다.

안집사(安集使) 김륵이 어명을 받고 김해 의병장에 임명되었고, 특히 월천 조목이 69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의병창설에 적극 협력하였으며, 4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군량미를 내놓았다고 향병일기에 전한다.

봉화 춘양에서 일어난 유종개 대장의 의병부대는 태백산을 근거지로 왜적을 막아 싸웠다. 영천에서 권응수 대장의 의병부대는 수백 명의 왜적을 살상하고 영천을 탈환하였다. 813일 임하에서 김윤명(18일 이정백으로 교체)이 대장으로 배용길, 이형남, 류복기 등 수백 명의 안동의병이 창설되어, 820일 예안, 의성, 의흥, 군위지역 의병과 연합하여 일직현에 모여서 1만 대오의 안동열읍향병을 창설하였다.

명실 공히 경상좌도 통합의병대가 조직된 것이다. 이 때 전국의 3만 의병에서 안동열읍향병1만으로 1/3을 차지하였다. 92일 김해를 대장으로 일직 운산역에서 1만 대오의 안동열읍향병이 행군할 때는 행렬이 10리나 되어 주민들이 감탄했다고 한다. 군율과 병법도 정립하여 대규모의 의병부대 면모를 갖추었다.

김해 대장은 행군수지(行軍須知) 병법을 엮어서 안동열읍향병을 정예부대로 이끌었다. 지휘관의 자세, 군령, 병사선발, 군마선별, 보급, 훈령, 진지, 경계, 간첩, 항복처리 등 전술전략을 교육훈련 시키고 정예부대로 편성하여 왜군을 기습공격 하였다. 특히 요충지인 당교(함창)진영을 이듬해 4월까지 집중공격 하여 왜군의 전라도 곡창지대 진출을 막았다.

15931월부터 권응수 부대와 연합하여 인동, 문경, 상주 왜군을 토벌하고, 5월에는 밀양, 양산, 경주 등 남부지역에서 이광휘 부대와 함께, 명군에 밀려 남하하는 왜적들을 끝까지 추격하였다. 경상좌도 의병대를 총동원하여 관군과 함께 퇴각하는 왜적들을 초토화시킨 것이다.

경상도의 곽재우, 김면, 정인홍, 호남의 고경명, 김천일, 충청도의 조헌, 경기도의 홍계남, 우성전, 황해도의 이정암, 함경도의 정문부, 8도 사찰의 승려 등이 전국에서 의병을 일으켜 조선을 지켜내고, 300년 후에는 독립운동으로 승화하여 또 다시 조국의 주권을 수복하였다.

임진왜란의 전세를 뒤집어놓은 안동열읍향병의 투혼은 의병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김휘태(전 안동시 풍천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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