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유림 주도로 15일 상량

월천종택을 복원하는 상량식이 1511시 안동시 도산면 동부리 월천서당이 있는 옛 종택 터에서 거행되었다.

조동주 월천 종손이 손님을 맞는 가운데 이날 상량식에는 거동이 불편한 이근필 퇴계종손을 대신해서 이동신, 이태원 도산서원 별유사가 참석한 것을 비롯하여 박원갑 경북향교 재단이사장, 이동수 치암종손, 이성원 농암종손, 김희두 조성당 문중회장, 김구현, 권오진, 박천민 전·현직 예안향교 전교가 종택 복원 축하 자리를 함께 했다.

조병기 담수회 회장의 사회로 진행된 상량 행사는 먼저 김성규 담수회 사무국장의 독축을 시작으로 권영세 안동시장과 김호석안동시의회의장의 상량고사에 이어 임대식 청년유도회중앙회장의 상량문 낭독 순으로 진행이 되었다.

상량식의 마지막은 참석자들이 종택 공사 현장에서 상량문 들보 홈에 한지에 적은 상량문을 넣은 후 상량이라고 크게 외치면서 끝이 났다.

한편 이날 상량기문인 월천당기는 문림 최성달 작가가 지은 것을 익재 서택석 선생이 쓰고 유당 임대식이 읽었다. 아래는 문림 최성달 작가가 지은 월천당기다.

 

월천당기月川堂記

10여 년도 넘었을 것입니다. 월천月川 선생先生11세손 조병기 담수회 안동지회장이 월천 종택宗宅 복원復元 이야기를 처음 저에게 꺼내었을 때 그저 지나가는 말로 흘려들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전에 온계 이해 선생의 종택宗宅이 복원된 예가 있기는 했으나 이러한 일은 실로 고금古今에도 드문 일이었기에 종손宗孫의 안쓰러움을 곁에서 보기가 힘들어 종택宗宅을 복원해야겠다는 조병기회장의 말은 솔직히 제 심중을 관통하지 못한 헛헛한 바람이 되어 귓전만 맴돌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의 실증實證인즉 실은 심중心中에 다하지 못한 말의 조각을 잠시 입 밖에 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기억하기로 앉을 때나 함께 원행遠行을 갔을 때나 오로지 이 한 생각뿐이었으니 권영세 시장의 탑전榻前에서 공손하게 손 모아 진언眞言 드린 것만 족히 몇 번인지 헤아리기도 어려울 지경입니다.

가까이서 뵈었을 때 한 살 터울의 형인 권 시장께서 먼저 망형우忘形友로 지낼 것을 청하기까지 했으나 그 앞에서 단 한 번도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한 치의 어긋남 없는 법도法道는 가히 월천선생의 후손後孫이라 할 만했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망형우의 탑전을 수백 번 오르내리고도 단 한 번도 일의 수고로움과 대책對策의 번거로움을 입에 올린 적이 없었으니 이때가 되어서야 비로써 저 같이 아둔한 속유俗儒도 통유通儒의 깊은 뜻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만한 다행이 없다 하겠습니다.

이에 감히 신령神靈께 고하는 바, 망형우의 관백 형이 술 사가며 월천의 동생과 밤새 종택 복원을 도모함은 옛 선고先故의 일을 상고上古해 보아도 이만한 정성이면 하늘에 닿을만하고, 그 맺은 바의 신실함 또한, 관포지교管鮑之交에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으니 근래에 이만한 믿음을 어디에 간다고 한들 두고 볼 수가 있겠습니까?

선생의 본관은 횡성橫城이고 자는 사경士敬이며 호는 월천月川입니다. 이외에도 동고東皐, 동옹皐翁, 동고만보東皐晩補, 동고산인東皐散人,천산川散, 동고산옹東皐散翁, 월천산인月川散人, 부용주芙蓉主 동고노자,東皐老者 부용산인芙蓉散人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선생의 가문은 고려 광종대 횡성군橫城君에 봉해진 한림학사翰林學士 조익趙翌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으며, 누대累代로 강원도江原道 횡성현橫城懸에서 명문대가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선생 집안이 경북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정선군사旌善郡事를 역임한 5대조 조온보趙溫寶가 문경현聞慶懸에 자리 잡으면서부터입니다.

이후 고조부 승정원정자承政院正字 조장趙璋이 예천인 손경孫璟의 딸과 婚姻을 하고 예천군 금당실로 이거를 했으며 증조부 조윤손趙胤孫은 이곳을 터전으로 사온서직장醞署直長을 지냈습니다. 월천 선생 집안의 예안으로의 이거는 아버지 조대춘趙大春이 군수를 지낸 안동권씨 수익受益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처가가 있는 예안 월천리에 문호가 열렸기 때문인데 그로부터 이 땅이 횡성 조문의 5백년 터전이 되었습니다.

월천 선생은 지금으로부터 497년 전인 1524(중종 19) 이곳 종택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종택 앞으로는 낙동강이 유장하게 흐르고 뒤로는 연꽃 모양의 부용산이 감싸고 있는 풍세風勢는 하늘이 비경을 감추고 있다가 비로소 선생에게 안거安居를 허락했다 할 만합니다.

가히 이 말이 허언이 아닌 것이 역동, 농암, 퇴계 선생이 지삼리와 분천, 온계에 안거한 후 명현홍유名賢弘儒가 동서 60리 남북 30리에 불과한 예안에 곡우穀雨처럼 쏟아져 내렸으니 다래는 월천이오, 부포는 성성재라. 한곡에는 조성당이 있고, 오천은 칠군자니 마을 안에 인재 없는 곳이 없었습니다. 이를 미루어 보아도 어찌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을 따른다는 말이 빈말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월천이라는 지명도 그렇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은빛 모래사장에서 반짝이던 돌들의 시간이 지나고, 채색 석양마저 강 너머로 넘어가 무릉의 경계에 발 디딜 즈음 떠오른 달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 되었다가 필시 어느 때인가는 그 옛날 이태백李太白이 술 취해 강에 빠진 달을 건지려 했을 만큼 신묘神妙함으로 둔갑하니 시문詩文에 달통한 풍류객風流客이라면 어찌 이곳 다래에서 시 한 수에 대취한 신선神仙이 되어 우화등선羽化登仙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월천 선생이 일찍이 벼슬에는 뜻이 없었으므로 해마다 제수하고 달마다 옮긴 관직이 40여 개나 되었지만 그나마 직무를 수행한 것은 봉화현감과 합천군수에 봉직奉職한 몇 년이 고작이었습니다. 한평생 벼슬에 나아가기를 무겁게 하고 물러나기를 깃털보다 가볍게 했으니 나아가서는 반드시 건설하고 이룩하는 바가 많았고 산림山林에 은거隱居해서는 선비의 격조格調를 지키며 학문하는 데 있어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습니다.

학문적 욕구가 왕성한 선생이었기에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구입하지 않은 책이 없었습니다. 하루도 그르지 않고 침식을 잊은 채 학문에 몰두하는 바가 아침에 학문을 깨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선비의 삶 그 자체였으니 스승 퇴계마저 독실篤實하기는 조사경 만한 인물이 없다고 했을 정도입니다.

선생의 학문은 후학을 가르치는 데도 가지런하기가 이를 데 없어 주위에도 소문이 자자했는데 그 방도를 살펴보면 먼저 소학과 대학, 중용을 가르친 연후에야 반드시 논어와 맹자를 주었고 시경 서경 주역의 3경은 맨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읽게 했습니다. 이는 대학과 중용의 장구章句를 초학의 필독서로 하고 논어 맹자의 집주를 겸학하게 하여 학문의 미세한 곳까지 달통하게 하려는 깊은 원려 때문이었는데 선생의 문하에 조성당 김택룡, 근시재 김해, 용담 임흘 김중청 같은 명유가 많이 배출된 것도 이러한 정밀함 때문이었습니다.

그중 선생이 일생 신실하게 파고들었던 책은 심경부주心經附註입니다. 심학心學의 경우 스승 퇴계도 제자 월천의 강론에 감탄할 만큼 빼어나 견해를 밝힌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퇴계와 월천이 정복심과 왕백의 도설, 부주附註에 인용된 정민정, 오징, 육상산의 학문 경향을 두고 치열하게 담론談論을 주고받은 것은 후에 스승 퇴계가 입장을 재정리해 심경후론을 발표하도록 하는 데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학문적 성숙은 물론 뒷날 퇴계학단을 형성하는 데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데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할 것입니다.

대저, 이때의 일을 두고 많은 이들이 말하기를 무릇 스승과 제자가 학문을 논함에 있어 묵수墨守만 있고 문답問答이 없었다면 어찌 그 옛날 퇴계의 학맥이 지금까지도 융융하게 이어질 수가 있었겠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공자에게 안회가 있고, 세존에게 아난이 있다면 실로 퇴계에게는 월천이 있다 하겠습니다.

다만, 일의 전후를 살펴보건대, 선생의 저서 월천문집, 주서초, 곤지잡록, 잡록, 한중잡록, 개표주역구결, 왜변일기가 임진년 병화 때 소실되고 그나마 남은 자료마저 1920년 종택 화재로 대부분 불타버려 현재 남은 것으로 월천의 학문을 제대로 상고하기 어려운 것을 빌미로 선생을 제대로 모르는 무리들이 흰소리나 하지 않을까 후학으로서 심히 저어되는 바입니다.

실로 선생이 정녕 소중하게 여긴 것이 1400여 서책이었다는 것에 비추어 본다면 자료의 소실은 먹먹한 안타까움이 아닐 수 없으나 저 아성 맹자 또한 집을 세 번이나 옮기고 나서야 학궁學宮에서 대유大儒가 될 수 있었던 바, 장차 새로 지은 이곳에서 효제孝弟를 근본으로 규장奎章 다듬는 일을 부지런히만 한다면 어찌 갓 쓴 선비가 읍하며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조병기회장의 기문記文 요청을 매양 사양만 했는데 무슨 영문인지 상량上梁 하루 전에 급하게 연락이 오니 물러설 곳이 없어 밤새워 쓴 글을 월천서당에 먼저 고하고는 종택 짓는 것을 바라보노라니, 산은 순후淳厚하고 물은 유장하게도 흘러가는 것이 마치 세상사 이치를 보는 것 같습니다.

이로써 종손이 거하고 종회를 열 수 있는 복록福祿 가득한 수십 칸의 옛집이 우뚝하게 솟아오르게 되었으니 여러 자손에게 당부하옵니다. 경모景慕하는 마음 또한, 백세百世토록 무궁無窮하게 솟아오르기를 빌고 또 비옵니다.

20211015

문림 최성달 文林 崔晟達 감읍 후 삼배 感吟 後 三拜 올리고 지은 글을 익재 서태석 益齋 徐太錫 쓰고 유당 임대식 儒堂 任大植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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