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트리고개에 남은 옛 금광의 자취 벼트리 마을에서 석평마을을 지나 옛 금광이 있다는 민트리재로 향했다. 석송령을 지나 민트리재로 차를 타고 한참을 올라가니 민가가 하나 나왔다. 집 굴뚝에선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서너마리의 개들이 저마다의 집에서 바닥에 바싹 머리를 웅크린채 물끄러미 손님을 쳐다본다.“여기서 걸어갑시다.”더 이상 차로 올라갈 수 없는 비포장 도로였다.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는 날 산길에 들어서니 옛길 그대로의 운치가 흠뻑 남아있었다. 민트리재는 큰 맛질 동북쪽에 있는 고개로 예천군 용궁면 대제리에서 감천면
▲ 지금은 사라진 관청이발관 어느 동네든 마찬가지다. 토박이들이 떠나고 터줏대감들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는 시대다. 운안동 관청이발관과 빵 굽는 냄새 가득했던 풍년제과가 문을 닫았다. 부부자전거의 여사장님은 세상을 떠났다 하고 그나마 운안동 거리를 여전히 지키고 있는 소문난 만두는 여전히 문을 열어놓았다. 3대째 이어져오던 안동 유일한 대장간이었던 운안철공소도 문을 닫은 지 오래다. 운안목욕탕도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다른 업종이 들어섰다. ▲ 운안목욕탕 자리에 있었던 안동 유일의 대장간 운안철공소 ⓒ김종육 금곡동, 안기동, 평화동,
프롤로그개천이 흐르고 그 개천 따라 나무가 우거진 오래된 큰 숲인 쑤가 있고 야트막한 산 아래 집들이 점점이 모여 있고 그 앞으로 배추밭이며 뽕나무밭이 있고 낙동강 강가로 흘러가는 개천 따라 논들이 펼쳐져 있었던, 그야말로 평화롭던 동네 평화동에 본격적으로 집들이 들어서고 지금의 동네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동네에 철도관사가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지금도 그때 닦은 도로와 골목이 그대로 있고 철도관사로 쓰였던 집들이 있고 오래전 여기가 옥동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옥동삼층석탑이 말없이 지키고 서 있는 동네 평화동 사람들의 이야기 속으
부자나무가 있는 예천군 천향1리"우리 어릴 때도 나무가 600년 됐다 켔는데, 안즉도 600년 이래. 내가 지금 나이가 벌써 일흔 살이 넘었는데." 예천군 감천면 천향1리에 사는 김규탁(74) 씨의 말이다. 천향1리에서 가장 오래된 터줏대감을 꼽으라면 마을 주민들은 한그루의 나무를 맨 먼저 꼽을 것이다. 성은 '석이고', 이름은 '송령'인 이 나무는 천향 1리의 자연촌락인 벼트리, 귀리, 돌밭, 샘밭, 진밭 등 5개 촌락 중 벼트리, 귀리, 돌밭(석평) 세 촌락의 성황당이다. 오랜 옛날부터 현재까지 마을의 단합과 안녕을 기원하는 동
프롤로그들마루에 나와 수박 갈라먹으며 폭염을 견디던 이웃들. 철제대문 아래로 낯선 사람이 지날 때마다 짖어대는 개, 텃밭에는 채소를 가꾸고 것도 없으면 화분에 열린 고추며 깻잎을 따먹는 사람들. 빙판이 생기면 연탄재 부셔 길을 내고 추운 겨울을 개량한옥 위태로운 미닫이문 문풍지 하나로 버텼던 골목의 풍경은 이제 점차 사라져간다. 최첨단에서 비껴간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직도 골목을 지키고 있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동네, 법상동. 안동시 중심부에 위치했지만 변두리처럼 고즈넉한 마을로 폭염이 내리쬐던 지난여름부터 11월에 첫눈이 내
도청 신도시 형성과 예천군청 이전에 따라 예천읍 원도심 상권의 경기 위축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골목상권, 토속 음식점, 재래시장 육성 등 도심 재생 해결책들을 마련하려는 노력들도 진행 중이다. 원도심의 중심지였던 남본1리와 구시장 상가 터줏대감을 찾아 그들의 애환과 마을의 변천사를 들어보자. ▲ 1972년 11월 1일 봉화 닭실 친정에서 결혼식을 올린 권점숙 부부 협동농공사를 운영한 권점숙 권점숙 씨는 1947년 봉화 닭실 출신으로 안동여고와 안동교대를 졸업했다. 고향 봉화에서 4년간 교직 생활을 하다가 결혼하면서 퇴직했다.
▲ 예천 관문 역할을 하는 굴머리 수양버들과 남본1리의 중심을 지나는 시장로 예천 원도심, 남본리 이야기 예천읍 굴머리 수양버들은 예천의 관문 역할을 하는 곳이다. 이곳에서부터 시장로를 중심으로 형성된 예천읍 원도심이 남본(南本)1리다. 예천읍사무소와는 500m 거리에 위치하며 동쪽으로는 중앙사거리와 교육청까지 동본1리와 경계를 이루고 서쪽으로는 굴머리와 경계를 이룬다. 효자로를 경계로 하여 서본1,2리와 나뉘며 한천을 경계로 남본2리와 나뉜다. ▲ 예천 맛고을거리 ▲ 예천 맛고을거리 남본리는 예천군 남읍내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 망천절벽 뒤편 산에서 바라본 마을 전경 ⓒ이호민 프롤로그 풍산면 마애리에서 남후면 방향으로 단호교를 건너면 망천절벽 뒷편 산으로 갈 수 있는 임도가 있다. 이주현 이장님께 전해들은 말을 따라 무작정 마을 전경 사진을 찍을 장소를 알아두기 위해 차를 타고 올랐다. 산길 외에는 사람의 손길을 탄 흔적이 없는 그곳은 야생 그대로였다. 기획연재는 둘째 치고 외딴 곳에서 멧돼지라도 만나면 어떡하나 불안감이 밀려왔다. 고개를 넘을 때마다 우람한 멧돼지 한마리가 성난 얼굴로 떡 하니 버티고 있을 것 같았다. 기껏 할 수 있는 거라곤 후진하는
괴정리의 자연마을 ▲ 갓뒤 버스정류장 갓뒤·갓디·지북(枝北) 괴정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34번 국도를 이용하여 예천 방면으로 진행하다가 풍산농공단지 조금 못 미쳐 풍산읍 오미리와 연결되는 지방도로 접어들면 만나는 마을이다. 숲의 뒤쪽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고 하여 갓뒤라 한다. 이 마을에는 매년 정월 보름에 동제사를 올리던 동수나무가 마을 뒤 산비탈에 보호수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이 느티나무로 인하여 괴정리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 가구 수는 50호 가량 된다. ▲ 바래미 바래미[발산(鉢山)] 갓뒤의 앞쪽 지대가 조금 낮은 곳에
옛 풍북면 소재지 괴정리괴정(槐亭)이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라면 가보지 않아도 동목으로 지정될 만한 거목이 한 그루쯤 있겠거니 짐작이 간다. 안동시 풍산읍 괴정리 역시 수령 500년 가까운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동네 뒷산 비탈에 우뚝한 마을이다. 느티나무는 팔십여 년 전에 사라진 이름 하나를 또렷이 기억한다. 바로 ‘풍북’이라는 행정명칭이다. 이 마을이 ‘풍북면’의 중심 마을이던 시절에 경험했던 볕의 맛과 바람 소리와 계절의 감촉들을 마주할 때 마다 나무는 그 때의 기억을 선명하게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를 살던 사람들은 현재에
태풍과 햇볕을 안고 살아온 평장개 사람들 독양1리에서 독양교 다리를 건너 옥개천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독양보건소가 보이고 개울 건너 아담한 정자가 자리 잡고 있다. 지형이 평탄하고 햇볕이 잘 드는 마을 평장개다. 막실하고 더불어 인동장씨들의 세거지다. 옥개천이 마을을 끼고 돌고 있어 정자를 짓고 시를 읊었던 곳이지만 지대가 낮아 물가 마을이다보니 옛날부터 비 피해가 컸다고 한다. 독양리 중에서도 전국을 휩쓸고 갔던 사라호 태풍을 직격탄으로 제대로 맞은 곳이 평장개 마을이었다. 보건소 옆에 살고 있는 독양2리 장민철 이장은 평장개서
예천군 보문면 독양리는 독죽마을, 어등역을 품고 있는 붉은재, 진양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 독양1리와 보건소가 있는 평장개, 인동장씨들이 모여 사는 막실, 안동김씨들이 모여 사는 들미고개 마을이 있는 독양2리로 이루어져 있다. 독양리는 보문면 중에서도 외지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예로부터 하천을 끼고 옥토가 많아 주로 농업에 종사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대부분인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이름난 문화재나 특산품이 있는 것도 아닌 독양리를 주목하게 된 것은 철길과 함께 마을을 길게 가로지르며 열차가 달리는 경북선 간이역 어등역 때
프롤로그2018년 안동예천 근대기행은 생생한 르포취재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밀도 있게 전달하고자 한다. 공동체의 삶이 해체되는 시대에 안동과 예천 두 지역의 역사와 문화, 생활사의 근간이 되는 ‘마을’ 즉 ‘동네’를 테마로 한 이야기를 들려줄 참이다. 우리가 살아왔던 공간에 대한 추억과 기록을 도시재생의 기로에 선 원도심, 구도심과 신도심을 비껴간 변두리, 자연부락의 변화를 오롯이 간직한 각 동네사람들의 생활사를 통해 탐사해보고자 한다. 그 첫 번째 동네는 행정구역상 서구동에 속하는 안동시내 서쪽에 위치한 법상동이다.